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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의 전쟁에서 패한 결과로 조선 임금이 당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굴욕에 대하여 알아보자.
조선시대 북쪽에 사는 만주족을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했다.청나라는 만주에서 일어난 만주족이 세운날라이다.만주족은 다른말로 ‘여진족’이라고 하는데 나라를 처음 세울 때 후금이라고 불리었다가 나중에 ‘청’이라고 바뀌었다.삼전도의 굴욕은 청의 침입으로 인한 정묘년의 정묘호란과 병자년의 병자호란으로 인한 7년간의 청과의 전쟁에서 조선이 패하여 인조가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태종에게 항복한 사건을 말한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추운 겨울날 소현세자와 신하500명을 데리고 남한산성 문을 나섰다.
청나라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송파 삼전나루에 이르니 청나라 황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청나라 황제는 단 위에 앉아 있었고 계단이 아홉 개나 설치된 높은 단이었다.황제를 우러러 보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높은 단을 설치 하였다.사방에는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수만명이 늘어서 있고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인조는 황제가 앉아 있는 단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백걸음을 걸어가 계단 밑에 엎드리고 항복하는 뜻으로 절을 했는데 한번 절을 할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땅에 대기를 세 차례 했다.
이것을 ‘삼배구고두’라고 하는데 삼전도의 굴욕에서 보여준 삼배구고두는 중국에서 신하가 황제를 만날 때 갖추는 예로 세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데 한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 번씩 대는 인사법이다.
조선이 이토록 부끄러운 항복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청나라는 왜 조선을 쳐들어 왔는지 알아보자.
당시 청나라는 중국의 주인이던 명나라와 라이벌이었는데 청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의 주인이 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조선은 청나라 명나라 사이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실리를 지켜 나갔으나 광해군이 임금자리에서 쫓겨나 인조가 즉위 하면서 ‘존명배청’을 하면서 명나라를 받들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청과의 관계가 악화 되었다.
그래서 1627년1월 청나라 군사 3만명은 압록강을 넘어 11일 만에 황해도까지 물밀 듯이 내려 왔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 결과 조선은 청과 형제 관계를 체결 하였다.오랑캐의 나라라고 무시하던 청나라를 형제로 대하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자체가 굴욕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정묘호란 이후 1636년 12월 청나라가 두 번째로 침입하였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청나라 태종의 공격으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하였으나 패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보이면서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그 결과 두 왕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