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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의 독립군은 통일된 군대가 아니라 각각 작은 규모의 부대를 따로 만들어 활동하여서 부대이름도 달랐는데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의 두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힘을 합쳐 일본군을 물리쳤다.
특히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로군정서보다 규모는 작지만 봉오동 전투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 용맹한 부대였다.
1920년 6월 일본군이 봉오동 입구에 나타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봉오동은 만주 왕청현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인 마을 이었다.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군 그리고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봉오동에 모여서 총사령관을 홍범도를 대장으로 하여 산마루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안간 소나기가 쏟아지고 동시에 안개가 골짜기와 산기슭을 자욱하게 뒤엎어 한 치 앞도 보이질 않게 되었는데 일본군은 그 틈을 타서 독립군이 진을 치고 있는 산마루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홍범도는 급히 명령을 내려 서둘러 퇴각하되 더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마침 빗발이 더욱 거세지더니 우박이 퍼붓고 천둥과 번개가 천지를 뒤 흔들었다.독립군들은 진지를 빠져나가 더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가서는 몸을 숨겼는데 마침내 일본군의 한 부대가 산마루로 올라섰다.그러자 산기슭에 남아 있던 일본군들은 이들을 독립군으로 착각하고 총을 마구 쏘아대었는데 산마루에 일본군도 맞받아 총을 쏘면서 일본군 자기들 끼리의 총격전이 되고 말았다.
더 높은 봉우리로 안전하게 피해 있던 독립군들은 일본군이 저희들끼리 총질을 해 대는 것을 내려다 보며서 홍범도 대장의 명령을 기다렸다.
홍범도 대장이 일본군 지휘관을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신호로 하여 독립군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대패하여 전사자가 무려 6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이것이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이다.
1920년 6월 22일 독립신문에 봉오동 전투의 승리 소식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독립신문은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발행한 신문이다.
봉오동 전투를 시작으로 1920년 10월에는 김좌진 장군의 청리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일본은 만주에 사는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참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본의 탄압을 피해 서일의 독립군단 조직은 러시아로 이동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석하기도 하였다.1921년 러시아 적색군의 배신으로 자유시참변이 발생하고 1925년에는 독립군 탄압을 위해 일제 총독부의 경무국장 미쓰야와 만주 군벌 장쭤린이 체결한 미쓰야 협정으로 독립군들의 탄압이 극에 달했다.
국외에서 벌인 무장항일 투쟁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항일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1920년대 국내에서 활동한 항일 무장 단체는 천마산대(평북 천마산).보합단(평북 동암산),구월산대(황해도 구월산)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