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족벌과 지역 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금과의 사대외교에 불만을 가진 묘청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배경에는 서경천도운동이 원인이 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에 대하여 알아보자. 묘청은 서경(지금의 평양)출신의 승려였다.그는 당대의 권세가인 이자겸을 제거 하는데 공을 세우고 제17대 왕인 인종의 고문이 되었다. 묘청은 문벌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면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인종을 설득했다. 개경은 문벌귀족들이 자리를 잡고 판치는 곳이니 수도를 개경를 떠나 서경으로 옮기자고 하였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개경은 이미 기운이 다해 서경으로 가면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고려를 받들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천도운동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또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반계'는 유형원의 호인데 우반동 근처에 흐르는 냇물의 이름에서 딴 것이고 ‘수록’은 ‘생각나는 대로 적은 글’이라는 뜻이다.실학자의 선구자로 알려진 유형원은 한양에서 태어나 서른두 살 때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으로 이사를 갔다.과거시험을 보아 관리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시골생활을 택하였는데 우반동은 한 때 그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이기도 했다.시골로 내려간 유형원은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 들으며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다.한편으로는 공부를 하고 한편으로는 농민 생활을 관찰하기를 20년,마침내 유형원은 자기 생각을 정리한 〈반계수록〉이라는 책을 썼다.유형원은 당시 토지제도에 대하여 “부자들이 넓은 땅을 한없이 서로 맞대어 있어 가난한 사람은 송곳..
정조의 화성행차는 회갑을 맞은 어머니의 회갑 축하 잔치를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이 있는 화성에서 하기로 하였다.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 맺힌 영혼을 달래고 나아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론들에게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함부로 하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를 하는 정조의 화성행차는 을묘년 1795년에 윤 2월9일부터 8일동안 벌어졌다.행차에 참가한 사람은 1779명 말은 779필이었지만 화성 행차에 모두 참여한 인원은 무려 6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정조의 화성행차는 숭례문을 빠져나와 지금의 서울역을 지나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 화성을 가기 위해서 한강에 배를 통하여 다리를 놓았다.한강을 오가며 장사하는 배 36척을 동원하여 배와 배를 연결한 다음 그 위에 판자를 ..
탕평책은 당쟁을 없애는 정책인데 탕평은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탕탕(王導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평(王道平平)’이라는 옛 글귀에서 따온말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정치는 지극히 공평하고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탕평책을 맨 처음 내놓은 사람은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유명한 숙종이다.그러나 숙종 때는 탕평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탕평의 목적은 당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의 권한과 권위를 되찾는 것이었다.숙종이후의 영조는 탕평책을 강조하면서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웠고 뒤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을 시행하였다.그러나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도 당쟁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했으나 상당히 당쟁을 줄이는 효과를 보았다.당쟁의 근본원인은 관직 수는 정해져 있는데 비해..
영조와 정조사이에 영조의 아들이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가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자. 영조의 대를 이을 왕의 장자는 효창세자 였는데 그가 일찍 죽어 제2인자인 사도세자가 세자로 책봉 되었다.영조의 성격은 본시 엄정하였으며 냉혹한 일면도 있었다. 영조는 사소한 일에는 동요되지 않고 일단 결심한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성품이었다. 영조25년 영조는 사도세자로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는데 세자는 학문을 게을리하고 궁녀나 내시를 함부로 죽이며 기녀와 여승을 희롱하는 증 영조의 마음을 거스리는 행동이 많았다. 영조의 마음은 항상 세자에 대하여 불안하였기 때문에 세자의 행동을 주시하게 되었고 이럴수록 사도세자의 마음은 거칠어지고 영조의 감시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러던 중 영조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왕조의 시조이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다.실록을 만든 이유는 역사를 중요하게 유교 사상 때문이었는데 유교에서는 옛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모범을 찾곤 했고 자신들의 말과 행동도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실록을 만들었다.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군사,제도,법률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또한 역사 기술에 있어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 모처럼 사냥을 나갔는데 태종이 사냥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태종..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하면 서경덕,이황,조식,그리고 우리가 잘아는 신사임당의 아들 이이이다.서경덕은 세상의 모든 사물은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여서 시작도 끝도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상태라고 주장했다.서경덕이 태어난지 12년 뒤인 1501년 이황과 조식이 태어 났는데 이황은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고 조식은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당시 사람들은 이황이 영남좌도를 이끌고 조식은 영남우도를 이끈다고 말하곤 했다.두사람은 당대를 주름잡은 내노라하는 성리학자였지만 두 사람이 걸아 간 길은 달랐다.이황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에 오른뒤 예순 살에 은퇴..
조선시대에 비록 도적이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고 부자들의 재물을 훔쳐다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사람들은 이런 도적을 의적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이 유명한 도적이 있었는데 이들을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불렀다. 홍길동은 연산군 때 조정 벼슬아치들의 근심거리였던 도적이었다. 홍길동의 이름과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에만 열 번도 넘게 나온다.〈조선왕조실록〉에 도적의 이름이 열 번 넘게 등장한다는 것은 그의 행적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홍길동은 평소에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사가 입는 옷차림을 하고 관리를 자처하며 대낮에도 거침없이 고을 관청을 드나들었는데 그가 이끄는 무리가 고을 수령들도 어쩌지 못할 만큼 세력이 컸다.우리가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