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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시대를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신라말기의 후삼국시대를 꼽을 정도로 후삼국시대는 후백제,후고구려,신라가 치열하게 힘을 겨루며 경쟁하던 때로 약45년간의 후삼국의 전쟁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중남부를 통일한 신라는 약 백년동안 번영을 누렸다.
수도 금성(지금의 경주)은 번영하는 신라의 상징으로 신라 대부분의 귀족인 지배층이 살았는데 사치에 빠지고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신라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치가 어지럽고 지배층이 사치스러우면 백성이 살기 힘들어진다.
백성들의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최초의 농민봉기는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봉기가 일어났다.그리고 또 금성 서남쪽 지방에서는 ‘붉은 바지 농민군’이 일어나 수도 금성까지 쳐들어가서 귀족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신라의 지배층은 수도 금성을 그럭저럭 지켜나갈수 있었지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을 다스리 힘은 점차 잃어갔다.
그틈을 타고 지바에서는 군사들을 모아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등장 했는데 그들이 호족이다.
그중에서 세력이 제일 컸던 것이 견훤,궁예,왕건이다.
견훤은 어려서부터 힘이 몹시 세고 용감하여 신라의 비장이 되었는데 비장은 신라의 군인직책인데 그리 높지 않고 한 부대를 지휘하는 직책이었다.
견훤은 신라의 서남 해안 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오늘날의 전라도 지방으로 가서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신라로부터 독립 선언을 한다.그후 견훤은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수도로 삼고 스스로 왕이 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후’백제가 아니라 백제라고 하는 것은 ‘후’는 예전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견훤이 세운 백제는 오늘날의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신라를 위협했다.외국으로부터 당당히 한나라로 인정 받고 싶어서 중국의 오월,후당과 사신을 주고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란,일본과도 사신을 주고 받았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무렵 궁예는 북원(지금의 원주)의 호족 양길의 부하로 있었다.
궁예는 군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상과 벌을 줄때는 공평하게 처리 하였기 때문에 따르는 군사가 많았는데 이를 계기로 마침내 철원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는데 그 때가 901년이고 나라 이름은 ‘고려’라고 했다. 궁예는 옛고구려의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민심을 얻으려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했다고 한다.
왕건은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인 왕륭의 아들이다.왕륭은 강원도를 휩쓸고 철원을 근거지로 삼은 궁예가 곧이어 송악으로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궁예와 맞서 싸우다가 화를 당하느니 차라리 마리를 숙여 집안과 생명을 보존하자고 생각했다.그만큼 궁예의 세력은 막강했다.
왕륭은 궁예에게 신하가 될 터이니 그 대신 자기 아들을 송악의 성주로 삼아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후 왕건은 궁예의 신임을 받는 청년 장군이 되어 경기도 광주 와 양주 일대,서울,충주 등을 차례로 정복한뒤 수군을 이끌고 바닷길로 전라도 나주를 공격하여 후백제의 한복판에 후고구려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궁예의 후고구려는 신라 땅의 절반이 넘는 지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신라는 후백제 와 후고구려에게 나라 땅을 대부분 내주고 금성(지금의 경주)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만 겨우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후삼국 시대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결국 후백제는 936년 멸망하였다.
신라의 경순왕은 935년에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면서 정승벼슬을 받고 자기의 맏딸인 낙랑공주와 결혼까지 시켜주었다.그리고 신라라는 이름을 없애고 경주라고 부르게 하면서 신라는 이제 고려의 한 주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약45년 동안 계속된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