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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주인이던 당나라가 멸망한 뒤 만주의 거란과 여진은 서로 중국을 차지 하려고 호시탐탐 놀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 새로 등장한 송나라는 거란,여진을 경계하면서 고려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고 고려는 어느 한쪽과 일방적으로 친한 관계를 맺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면서 나라의 이익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993년 일어난 거란의 1차 침입 때 고려는 서희의 활약으로 큰 싸움 없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강동6주를 확보하는 외교적 담판을 이끌어 냈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 거란군의 총사령관은 거란 왕의 사위인 소손녕이었다.
“우리 군사 80만이 도착했다.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기필코 섬멸해 버리고 말테니 고려의 왕과 사신들은 빨리 항복하라”라고 소손녕이 말하였다.이에 놀란 고려 조정은 서경(지금의 평양)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해를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는데 서희는 반대하면서 자기가 소손녕을 만나 담판을 지겠다고 왕명을 받아 사신으로 거란 진영에 도착했다.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뜰에서 내게 절해야 하오”라고 소손녕이 말하자 서희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 아래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지만 양국의 대신이 만나는 자리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소”라고 말하면서 서희는 숙소로 돌아와 꼼작도 하지 않았다.
이에 소손녕은 서희의 당당한 태도에 내심 감탄하며 동등한 자격으로 만나자고 다시 청했다고 한다.
결국 서희와 소손녕은 마주 앉아 담판을 시작했다.“그대의 나라는 옛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고 옛 고구려의 땅은 이미 우리 영토가 되었소.그런데 어찌하여 침범하여 하였소?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까닭은 무엇이오?”라고 소손녕이 말했다.이에 대하여 서희는 “그렇지 않소.우리나라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요.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요 .귀국의 동경이 요양은 원래 고구려의 땅으로 우리 영토가 되어야 마땅하니 어찌 침범했다고 할 수 있겠소? 또 압록강 안 팍은 본래 우리 영토인데 그 사이에 여진이 끼어들어 우리가 그곳으로 다니기란 바다보다 더 어렵소.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오.만일 여진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길이 통하게 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소?그대가 내 말을 귀국의 임금에게 전한다면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소?”라고 말하며 서희는 거란이 공격해 온 의도가 고려를 송두리째 손에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송의 관계를 끊는데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서희는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이고 여진,거란,송에 둘러싸인 당시 고려의 처지와 국제관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라고 대답하면서 일부러 수도를 개경이 아닌 평양이라고 한 것이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거란은 압록강 서쪽에 다섯 성을 새로 쌓아 고려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고 고려는 서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흥화진(지금의 의주),용주(지금의 용천),철주(지금의 철산),통주(지금의 선천),곽주(지금의 곽산),귀주(지금의 귀성) 등 6곳에 성을 쌓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강동6주이다.
서희의 외교적 담판으로 인하여 고려는 싸우지도 않고 거란을 물리 쳤을 뿐아니라 여진의 손에 들어가 있던 압록강 일대를 고려 영토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