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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황 이이

처음나리다18 2020. 7. 15. 19:00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하면 서경덕,이황,조식,그리고 우리가 잘아는 신사임당의 아들 이이이다.

서경덕은 세상의 모든 사물은 ()’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여서 시작도 끝도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상태라고 주장했다.

서경덕이 태어난지 12년 뒤인 1501년 이황과 조식이 태어 났는데 이황은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고 조식은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황이 영남좌도를 이끌고 조식은 영남우도를 이끈다고 말하곤 했다.

두사람은 당대를 주름잡은 내노라하는 성리학자였지만 두 사람이 걸아 간 길은 달랐다.

이황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에 오른뒤 예순 살에 은퇴할 때까지 크고 작은 벼슬을 두루 걸쳤으나 조식은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제자를 가르치는데만 전념을 하였다.

이황이 완전히 벼슬을 놓고 고향에 내려가 도산서원을 세우고 학문연구와 제자 교육에 몰두한건 예순 살 때 부터이다.

서경덕의 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하는 것에 비해 이황의 는 변함없는 고정불변의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그런데 조식은 연구보다는 실천을 강조 했다.

우리가 이황은 잘 알고 있지만 조식은 이황에 비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광해군 밑에서 정승노릇을 하다가 광해군이 쫓겨나면서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기 때문이다.역적의 스승인 조식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은 금지되어 조식의 학문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이이는 이황과 조식보다 35년 뒤에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이이는 평생동안 벼슬을 놓지 않고 정치에 적극참여 하였는데 이이가 서경덕이나 조식과는 다르게 정치에 적극 나섰던 것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이황과 조식이 살던 시대는 문정 왕후와 그 친척들이 판치던 때라 기개 있는 선비들은 조정에서 버티기 어려웠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는 서경덕의 제자들,조식의 제자들,이황의 제자들은 스승처럼 묻혀 살지 않고 적극적으로 조정에 진출했다.

이이는 를 중시한 서경덕이나 을 중시한 이황과는 다르게 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와 기를 나누려는 사람은 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이와 기가 묘하게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은 깨닫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다.”라고

주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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