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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처음나리다18 2020. 12. 28. 22:06

고려시대 족벌과 지역 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금과의 사대외교에 불만을 가진 묘청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배경에는 서경천도운동이 원인이 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에 대하여 알아보자.

묘청은 서경(지금의 평양)출신의 승려였다.그는 당대의 권세가인 이자겸을 제거 하는데 공을 세우고 제17대 왕인 인종의 고문이 되었다.

묘청은 문벌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면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인종을 설득했다.

개경은 문벌귀족들이 자리를 잡고 판치는 곳이니 수도를 개경를 떠나 서경으로 옮기자고 하였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개경은 이미 기운이 다해 서경으로 가면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고려를 받들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천도운동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또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연호도 중국을 따라 쓰지 말고 독자적으로 써야 한다고 칭제건원을 주장하였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화친하지 말고 이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동조한 윤언이,정지상,백수한 등이 묘청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서자 문벌귀족에 불만이 많았던 인종은 묘청의 말에 솔깃하여 서경에 새 궁궐을 짓게 하고 서경천도를 꿈꾸었다.

그러나 서경천도는 문벌귀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는데 당시의 개경의 문벌귀족들에게는 서경천도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리데 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서경천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그러자 반란을 진압할 토벌군이 구성되었는데 그 토벌군 사령관이 김부식 이었다.

우리가 한국사에 많이 등장하는 고려시대 인물이 김부식과 묘청이다.

고려시대 서경파와 개경파로 파벌 싸움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서경파는 묘청과 정지상이 등장하여 풍수지리 사상을 바탕으로 북진정책을 주장하였고 반면에 개경파는 유교 사상을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책을 강조한 신라를 계승한다는 보수적 성격을 띠었다고 알고 있다.

토벌군 총사령관 김부식은 개경에 남아 있던 정지상과 백수환을 죽였다.반란은 묘청이 죽은 지 1년 뒤에 완전히 진압되었고 김부식은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칭호를 받고서 최고의 관지과 명예를 얻었다.

묘청의 난의 결과 문벌귀족의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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