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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유형원 반계수록

처음나리다18 2020. 7. 19. 16:47

'반계'는 유형원의 호인데 우반동 근처에 흐르는 냇물의 이름에서 딴 것이고 수록생각나는 대로 적은 글이라는 뜻이다.

실학자의 선구자로 알려진 유형원은 한양에서 태어나 서른두 살 때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으로 이사를 갔다.

과거시험을 보아 관리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시골생활을 택하였는데 우반동은 한 때 그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이기도 했다.

시골로 내려간 유형원은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 들으며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다.

한편으로는 공부를 하고 한편으로는 농민 생활을 관찰하기를 20,마침내 유형원은 자기 생각을 정리한 반계수록이라는 책을 썼다.

유형원은 당시 토지제도에 대하여 부자들이 넓은 땅을 한없이 서로 맞대어 있어 가난한 사람은 송곳하나 꽂을 땅도 없는 꼴이 되었다고 하면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고 하면서 나쁜 꾀를 품은 자들이 토지를 독차지하는 반면에 백성들은 가족을 이끌고 떠돌다가 끝내 머슴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토지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다.

조선시대의 토지제도는 근본적으로 농민보다는 양반에게 유리한 제도이고 왜란과 호란이 끝난뒤부터는 양반이 토지를 독차지 하는 일이 일어났다.양반이 토지를 독차지 하니 가난한 농민은 농사지을 땅이 없어 양반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짓고 토지를 빌린 대가로 추수한 곡식의 대부분을 양반에게 바쳐야 했기 때문에 농민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재산을 모으기는커녕 갈수록 가난해지기만 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는 나라의 모든 토지를 일단 나라의 소유로 만든다음 다시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자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하면 가난한 자와 부자의 차이가 없어질 거라고 했다.

그리고 반계수록에는 토지제도 외에도 과거제도,노비제도 등 각 방면에 걸친 개혁안이 실려 있다.

유형원이 죽은 후 그의 제자 들이 반계수록을 한양의 벼슬아치들에게 보냈지만 한양의 벼슬아치들은 내용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반계수록이 빛은 본 건 70년이 지난 영조 때 였는데 영조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조정대신 들과 지방 관리들에게 널리 읽게 했다.

유형원은 균전제 토지제도를 주장하고 양반 문벌제도,과거제도,노비세습제의 모순을 비판하였으나 가정 내에서의 적서차별,군대 편성상의 양반과 천민의 차별,노비제도 자체는 인정하는 개혁사상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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