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는 유형원의 호인데 우반동 근처에 흐르는 냇물의 이름에서 딴 것이고 ‘수록’은 ‘생각나는 대로 적은 글’이라는 뜻이다.실학자의 선구자로 알려진 유형원은 한양에서 태어나 서른두 살 때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으로 이사를 갔다.과거시험을 보아 관리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시골생활을 택하였는데 우반동은 한 때 그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이기도 했다.시골로 내려간 유형원은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 들으며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다.한편으로는 공부를 하고 한편으로는 농민 생활을 관찰하기를 20년,마침내 유형원은 자기 생각을 정리한 〈반계수록〉이라는 책을 썼다.유형원은 당시 토지제도에 대하여 “부자들이 넓은 땅을 한없이 서로 맞대어 있어 가난한 사람은 송곳..
정조의 화성행차는 회갑을 맞은 어머니의 회갑 축하 잔치를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이 있는 화성에서 하기로 하였다.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 맺힌 영혼을 달래고 나아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론들에게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함부로 하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를 하는 정조의 화성행차는 을묘년 1795년에 윤 2월9일부터 8일동안 벌어졌다.행차에 참가한 사람은 1779명 말은 779필이었지만 화성 행차에 모두 참여한 인원은 무려 6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정조의 화성행차는 숭례문을 빠져나와 지금의 서울역을 지나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 화성을 가기 위해서 한강에 배를 통하여 다리를 놓았다.한강을 오가며 장사하는 배 36척을 동원하여 배와 배를 연결한 다음 그 위에 판자를 ..
탕평책은 당쟁을 없애는 정책인데 탕평은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탕탕(王導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평(王道平平)’이라는 옛 글귀에서 따온말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정치는 지극히 공평하고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탕평책을 맨 처음 내놓은 사람은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유명한 숙종이다.그러나 숙종 때는 탕평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탕평의 목적은 당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의 권한과 권위를 되찾는 것이었다.숙종이후의 영조는 탕평책을 강조하면서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웠고 뒤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을 시행하였다.그러나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도 당쟁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했으나 상당히 당쟁을 줄이는 효과를 보았다.당쟁의 근본원인은 관직 수는 정해져 있는데 비해..
영조와 정조사이에 영조의 아들이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가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자. 영조의 대를 이을 왕의 장자는 효창세자 였는데 그가 일찍 죽어 제2인자인 사도세자가 세자로 책봉 되었다.영조의 성격은 본시 엄정하였으며 냉혹한 일면도 있었다. 영조는 사소한 일에는 동요되지 않고 일단 결심한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성품이었다. 영조25년 영조는 사도세자로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는데 세자는 학문을 게을리하고 궁녀나 내시를 함부로 죽이며 기녀와 여승을 희롱하는 증 영조의 마음을 거스리는 행동이 많았다. 영조의 마음은 항상 세자에 대하여 불안하였기 때문에 세자의 행동을 주시하게 되었고 이럴수록 사도세자의 마음은 거칠어지고 영조의 감시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러던 중 영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