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 내용과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종19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국과 일본의 세력이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반대한던 민씨 일파들은 지금까지 내려온 사대사상에 적은 인습 때문이었는지 청국에 기대는 보수세력이 되었고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 하루속히 개화정책을 실현하려는 급진 개화파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고종21년 1884년 이들 급진 개화파는 청국의 국내 문제가 복잡한 계기를 이용하여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밀의하여 일본 주둔군의 힘을 빌어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우정국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14개조의 정강을 발표하였다.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은 다음과 같다. 1.청에 잡혀간 흥성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여 종래 청에 대하..
아관파천은 국가의 상징인 왕이 러시아 공사관 밀실로 유폐생활을 하러 간 것을 말하는데민비(명성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을 계기로 하여 우리나라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정국이 소란 해졌다.러시아의 웨베르 공사는 공사관을 보호 한다는 구실로 수병 백명을 서울로 데려왔다.기회를 노리고 있던 친러파인 이범진 등은 웨베르 공사와 공모하여 1896년 2월11일 새벽에 국왕과 세자를 여성용 교자에 숨겨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 갔다.왕을 일개 정권의 상징으로 밖에 보지 않는 당시의 정객들은 친일파나 친러파를 막론하고 모두 어떻게 하면 왕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서 정권을 잡아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왕의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정식으로..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여왕이 있었던 나라가 바로 신라인데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신라에는 여왕들이 있었는데 선덕,진덕,진성 여왕들이다.여자가 나라를 다스린 경우는 고려와 조선에도 여러 번 있었는데 왕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볼수 없거나 뭔가 특별한 이유로 왕 노릇을 할 수 없을 때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가 잠시 정치를 대신하는 ‘수렴청정’이 있었다.수렴청정이란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본다는 뜻으로 여자인 대비가 남자 신하들과 얼굴을 맞대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로 생각해서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보았다.신라에만 여왕들이 있었던 것은 신분제도인 골품제와 관련이 깊다.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맏딸인데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성골로 왕위를 이을 사람은 선덕여왕 뿐이었다.선덕여왕은 성은 김씨로 아버..
신라에는 통일 전부터 골품제도라는 독특한 신분제도가 있었다.이 제도는 사람을 골과 두품으로 나누어 신분을 정해 놓은 것인데 신라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자동으로 부모의 신분을 물려 받았다. 물론 신분제도는 고구려 백제에도 있었지만 신라의 골품제도만큼 일상 생활까지 시시콜콜 간섭한 경우는 없었다. 골품제도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골’신분과 6두품부터 1두품까지 여섯 등급의 ‘두품’이라는 신분이 있었다. 두품은 6두품이 가장 높고 숫자가 낮아 질수록 신분이 낮아져 1두품이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른뒤에 1두품에서 3두품까지는 평민과 똑같이 취급되어 성골,진골,6두품,5두품,4두품,평민으로 신라인의 골품제가 완성되었다. 진골과 성골은 왕족이기 때문에 이들은 오를 수 있는 벼슬에 제한이 없었다.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둘 다 고려 때 쓰여진 역사책인데 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삼국시대를 다루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차이점은 〈삼국사기〉는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책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없는 단군이야기를 실려 있는 역사책으로 둘 다 고려 시대 이전의 역사를 알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역사책은 누가,어떤 생각으로 썼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를 ‘사관(史觀)’이라고 한다. 사관은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매우 관계가 깊다. 그래서 역사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을 누가 썼는지 그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살았으며 어떤 사관을 가졌는지 또 어떤 이유에서 그 책을 썼는지를 알고 읽는 것이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삼국사기의 유학자 김부식과 삼국유사의 스님 ..
중국이 주인이던 당나라가 멸망한 뒤 만주의 거란과 여진은 서로 중국을 차지 하려고 호시탐탐 놀고 있었다.그런데 중국에 새로 등장한 송나라는 거란,여진을 경계하면서 고려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고 고려는 어느 한쪽과 일방적으로 친한 관계를 맺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면서 나라의 이익을 구하려고 노력했다.993년 일어난 거란의 1차 침입 때 고려는 서희의 활약으로 큰 싸움 없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강동6주를 확보하는 외교적 담판을 이끌어 냈다.거란이 침입했을 때 거란군의 총사령관은 거란 왕의 사위인 소손녕이었다.“우리 군사 80만이 도착했다.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기필코 섬멸해 버리고 말테니 고려의 왕과 사신들은 빨리 항복하라”라고 소손녕이 말하였다.이에 놀란 고려 조정은 서경(지금의 평양)..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시대를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신라말기의 후삼국시대를 꼽을 정도로 후삼국시대는 후백제,후고구려,신라가 치열하게 힘을 겨루며 경쟁하던 때로 약45년간의 후삼국의 전쟁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중남부를 통일한 신라는 약 백년동안 번영을 누렸다. 수도 금성(지금의 경주)은 번영하는 신라의 상징으로 신라 대부분의 귀족인 지배층이 살았는데 사치에 빠지고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신라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치가 어지럽고 지배층이 사치스러우면 백성이 살기 힘들어진다. 백성들의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최초의 농민봉기는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봉기가 일어났다.그리고 또 금성 서남쪽 지방에서는 ‘붉은 바지 농민군’이 일어나 수도 금성까지 쳐들어가..
668년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요동지역에는 수많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약 10년간 당나라에 항거하면서 재개의 기회를 꾀하고 있었다.7세기 말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대조영 장군이 영주에 있던 거란을 몰아내고 그 무리와 말갈족의 일부를 거느리고 옛 땅인 동모산에서 698년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의 맥을 잇는 발해였다.발해 시조 대조영이 21년간 기반을 닦은 뒤 아들 2대 무왕과 3대 문왕 때에 이르러서는 국토가 확장되고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721년에는 동북경에 큰 성을 구축하기도 하였다.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이동 한 것도 국내 지배체제의 정비 발전을 위한 거점도시 확보를 위한 방법이었다.발해의 전성기는 9세기 초 10대 선왕 때로 성당(盛唐)문화를 받아 들여 해동성국이라고까지 불리웠다.발해는 ..